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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커버린 원숭이가 부르는 노래/인생은 언제나 삐딱선

#잠 못 이룬 날들에 대한 기록 4 - 약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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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의학적 지식이 없는 비전문가의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초진 때 의사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약을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는 먹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육 개월, 길게는 일 년까지 바라보고 치료를 시작해 봅시다. 그 말이 나에게 용기를 주었던 것 같다. 나야말로 약에 의존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렇지만 의존성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겠다고 모처럼 마음먹은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극단적인 부작용을 두려워하는 것은 마치 이런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운동장에서 넘어져 무릎이 까졌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보통은 환부를 깨끗하게 닦은 다음 빨간 약이나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붙일 것이다. 운동장 바닥을 갈아버려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불필요한 장애물들을 모두 사전에 제거하고 살 수는 없다. (연진이도 그러지 못했어)

그리고 과거 대량 복용으로 자살에 비극적으로 사용되었던 수면제와 현재 처방을 통해 복용할 수 있는 수면제는 좀 다르다. 약을 모아서 한꺼번에 다 털어 넣어도 죽지 않는다. 목숨은 촛불처럼 휙 꺼질 것 같지만 쇠심줄보다 질기더라.

낮까지 졸린 증상이 이주 넘어서야 잦아들긴 했지만, 의사와 상의하며 복용하면서 나에게 맞는 약을 찾아가고 있다. 약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치사량, 마약, 부작용... 살벌한 단어들이 보이는데 이것도 임상에서 흔하게 처방되는 약물일 뿐이다. 흔하게 먹는 아세트아미노펜 성분의 진통제(ex. 타이레놀)도 술이랑 먹으면 간에 매우 안좋다(술이 확 깨긴 함).

최근 프로포폴에 대한 논란도 재조명되고 있다. 프로포폴은 정맥으로 투여하는 수면마취제의 일종으로,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나는 느낌 때문에 정신적 의존성을 유발할 수 있다. 무분별한 남용과 불법적인 유통이 문제인 것이지 약은 죄가 없다. 나의 병을 함께 치료해 줄 전문가와 함께 컨트롤하면서 복용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며 이롭게 이용해야 한다. 물론 말은 쉽다. 나는 담낭(쓸개)절제술을 한 뒤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생겨 한동안 각종 소화제를 달고 살았던 것처럼, 현재도 생활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약을 복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 자신을 나답게 만들어주기 위한 특별한 영양제라고 말이다. 나는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고 싶지는 않지만,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기는 하다. 약은 그런 바람에 정말로 보탬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분명 약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않는다. 나를 달콤한 수면에 들게 해주는 약도 점점 증량해 나가야 할지 모른다. 어쩌면 약도 들지 않을 만큼 고난의 순간에 처할 수도 있다. 언젠가 작성하게 될 잠 못 이룬 날들에 대한 기록의 마지막 글이 나는 그렇게 치료를 끝냈다. 는 해피엔딩이기를 딱히 기대하지 않는다. 갑자기 어느 날 아 잠이 안와 미쳐버릴 것 같다는 글을 기록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 잠 못 이루는 날들의 기록은 이제 당분간은 남기지 않을 테지만. 언젠가는 이런 날들이 있었네 하고 돌아볼 수 있도록 기록하고 싶다. 5편의 내용이 무엇이든 지금처럼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있길 바란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다.

언젠가 모두 떨어질 것을 알지만 벚꽃의 개화를 기다리는 것처럼,


횡단보도 건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건너야 한다. 때로는 초록불이 아닌 빨간불일지라도.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있을 것이다.


잠 못 이루는 날들의 기록, 202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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