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이룬 날들에 대한 기록 2 - 내담자가 되어가는 과정

사실 오랫동안 불면에 시달리면서도 약을 처방받아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그냥 그런 선택지 자체가 나에게 없었던 것 같다. 약을 처방받는 순간 비정상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 같아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나 자신을 다그쳤다. 이 정도 가지고 약까지 먹어? 아직 덜 피곤한가 보지. 생각을 자꾸 해서 그런 거야. 생각하지 말자. 나약해지지 마.

주된 계기는 코로나에 확진되기 한 달 전 즈음 받은 심리상담이었다. 무료로 상담을 받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딱히 가서 무언가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다양한 심리검사를 해볼 수 있다는 동료의 추천에 용기를 얻어 심리상담을 예약했다. 가장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선택했다. 그 동네에는 내가 좋아하는 카페가 있었고 그곳의 라떼는 나를 항상 들뜨게 했다.

상담장소는 뭐랄까, 참 특이한 공간이었다. 별세계 같다고나 할까, 이세계 같다고나 할까. 그저 원룸을 평범한 사무실로 꾸며놓았을 뿐인데 흩날리는 커튼과 잔잔한 음악소리, 막 내린 커피의 향 같은 것들이 춤을 추듯 어우러졌다. 친구도 가족도 회사동료도 아닌 상담자와 내담자라는 특별한 관계 위에서 나는 서서히 무장해제됐다.

몇 가지의 심리검사를 했고, 검사결과를 바탕으로 참 오랜만에 남에게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 내가 한 검사는 MMPI, SCT, TCI)

실은 내담자가 되었던 기간 동안 나는 더 많이 우울했다. 다시는 꺼내보지 않으려 깊숙이 숨겨둔 감정을 입 밖으로 털어놓는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상담이 끝날 때마다 근처 공원에서 나는 조금 울었다. 50분이라는 짧은 상담이 끝이 나면 강도 높은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숨이 찼다. 후련함과 동시에 매우 지치는 과정이었다. 때론 거센 폭풍우가 들이닥치기도 하지만 보통은 잠잠했던 나라는 파도에 큰 돌이라도 던진 것 같았다.

결론적으로는 잘 갔다고 생각한다

상담사는 병원에 가보는 것을 조언해 주었다.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인간은 원래 누구나 우울하고 약해지기도 하고 그러다가 괜찮아지고를 반복하지 않나? 나에게 우울은 마치 계절성 알레르기처럼 주기적으로 왔다가, 감기처럼 면역력이 떨어지면 걸리는 증상이었다. 꼭 그래야 할까요? 이 계절이 지나가면 또 괜찮아질 건데요.

10회가 채 되지 않는 상담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나는 더 이상 상담예약을 하지는 않았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상담사의 질문에 순간 멍해졌다. 나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꺼내놓으면 폭풍우라도 일으킬 것 같은 나의 오래된 이야기는 마침내 맞닥뜨린 최종보스가 아니었다. 수십 년간 외면해 온 매듭짓지 못한 나 자신일 뿐이다. 스스로를 절벽 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아슬아슬, 줄다리기하듯이. 털어놓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허탈감과 탈력감, 그리고 허무함을 느꼈다.

병원을 알아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불면을 홀로 이겨내기보다 약물의 도움이라도 받아야겠다는 다짐이 생겼다. 마침내 나는 이 감기를 혼자 이겨낼 수는 없겠다고 인정했다.

수분 빠진 나를 위로해준 인생 바닐라라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