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의학적 지식이 없는 비전문가의 주관적인 경험입니다. 병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러나 병원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잠시 난관에 부딪혔다. 몰랐는데 정말 많은 정신의학과 의원이 도처에 있었다. 송충이 눈에는 솔잎만 보인다더니 딱 그 말대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약은 쉽지 않았다. 가능한 집에서 가깝고 평이 좋은, 그리고 주말 예약이 가능한 곳으로 고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곳들은 대부분 평일 낮시간 대에나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것도 일주일 뒤, 심하면 한 달 뒤까지. 조금 충격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나는 최근 왕복 출퇴근 시간이 길어져서 평일엔 전혀 시간이 나질 않았다. 최종적으로 내가 고른 곳은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의 개원한 지 7개월 된 비교적 예약이 쉬운 병원이었다. 의사의 첫인상은 아 쫌 쓰네... 였다. 상담 선생님이 따뜻한 라떼였다면 의사 선생님은 차가운 롱블랙 같았다. 불친절했다는 뜻은 아니고 그냥 첫인상이 그랬다. 아무래도 흰색 가운이 주는 심리적인 거리감이 있다.
초진이고, 진료과의 특성상 내 이야기를 해야 했는데 쉽지 않았다. 그냥 못 자요. 약만 주시면 안 되나요? 라는 말이 목젖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상담 때 한번 해보았다고 다시 한번 이야기를 꺼내는 건 처음보다 쉬웠다.
상담이 끝날 즈음 잘 오셨어요. 그 짧은 한마디에 울컥하여 침만 여러 번 꿀꺽 삼켰다.
일주일치를 처방받았다. 첫 주는 꽤 깊은 숙면을 했다. 다만 신기할 정도로 식욕이 사라졌고, 시도 때도 없이 하품이 나왔으며, 턱이 자꾸 떨려 이를 악물게 됐다. 이를 악무는 시간이 길어지자 턱이 뻐근하고 어금니에 통증이 생겼다.
2주 차에는 입면은 되는데 두세 시간 있다 깨어났다. 인간 생체시계가 된 것 같아 신기했다. 나에게 맞는 약물을 찾는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었지만,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수면을 취한 것만으로 일상생활이 나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처럼 졸리고 피곤하지 않으니 평소 같았으면 짜증이 났던 상황에서도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3주 차에는 약을 변경했다. 이즈음에는 식욕도 돌아오고 턱떨림 증상도 사라졌으며, 하품도 정말 많이 줄었다. 여전히 새벽에는 두세 번 깨어나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뜨지만 어쨌든 잠을 자긴 잔다.
사실 불면 외에도 상담받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때때로 찾아오는 우울감이었다. (약 처방만 외에도 방문시마다 30분 정도 상담을 했고, 약의 부작용이 심할 땐 전화로 상담해 주셨다) 나는 이러한 기분을 감기처럼 여겼다. 그리고 나는 이 감기의 치료법(나에게 적용되는)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방구석에 처박혀있으면 완치가 느려진다. 햇빛 좋은 날에는 밖에 나가 비타민D를 합성하거나 사람을 만나 수다를 떤다. 사람이 만나기 싫으면 혼자서라도 카페에 가서 웅성이는 사람들 사이에 낑겨앉는다. 그러면 침전되어 바닥에 들러붙어있는 물때같은 몸뚱어리가 조금이나마 한결 떨어지는 것이다.

나다니기에 드럽게 춥다거나 덥다거나 하는 날이어서 나가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집안에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 가볍게는 베이킹, 청소, 빨래부터, 옷장을 다 뒤집어 안 입는 옷 정리하기, 대충 걸어둔 옷 색깔별 재질별 정리하기, 서랍 뒤집어 물건 정렬하기 등등. 땀이 나도록 정신없이 움직이고 나면 한결 뇌를 좀먹던 무언가가 잠잠해지곤 하는 것이다.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참 부지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스로 평가하는 나 자신은 게으르다. 부지런함은 그저 감기에 걸리지 않고자 하는 나의 발버둥이다. 나는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이런 감기를 앓곤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찾아오고야 마는 궂은날이 있다. 이 궂은날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보통 특정 장소에 다녀오는 날이면 늘 깊은 우울감에 빠지곤 한다.
우울이라는 이름의 바다가 있다면, 족쇄를 발목에 걸고 하염없이 깊은 아래로 빠져들었다. 헤엄쳐 나올 의지도, 생각도 없다. 세상에 오롯이 나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돌아올 때는 극심한 외로움을 느낀다. 나의 편은 지구에도 오르트 구름 밖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존재 자체가 무가치해진다. 어느 순간 스스로를 컨트롤하기 어렵다고 느낀다. 자칫 눈에 보이지 않는 허들에 걸려 넘어지고야 말 것 같다... 마치 감기처럼 이삼일 앓고 나서야 그 기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바다에 배를 타고 동동 떠다니는 것 같았다. 약을 복용한 지 4주 차였다. 5주 차에는 약을 한번 더 변경했다. 새벽에 자꾸 깨는 것을 줄여줄 것이라고 했다.
약의 효과는 대단했다! 먹고 나서 30분이 채 안되어 깊은 수면에 빠졌다. 스르륵 이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마법 같은 감각을 참으로 오랜만에 느꼈다.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달콤한 그 느낌이라니. 다음날 회사에서도 꾸벅꾸벅 졸았다. 오후 네시가 돼서야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그동안 낮잠을 잔 지도 꽤 오래되었는데 낮에도 기절한 듯이 잤다. 주말의 하루는 정말로 잤다, 라는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여느 때보다 알찬 하루를 보낸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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