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오카의 이튿날이다. 빗소리에 새벽에 한번 깨긴 했지만 다행히 아침까지 푹 잔 나는 축축해진 공기를 느끼며 잠에서 깼다. 밖은 아직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기에는 하나 둘 뺨을 때리고, 쓰기엔 팔목이 아픈 그런 빗방울이었다. 막 감아 축축해진 구불구불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돌돌 말리고 로션만 챱챱 바르고 홍조가 발갛게 떠오른 얼굴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썼다. 올해 초에 한 시력교정수술 덕에 마스크를 써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지 않아 다시 한번 수술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원래 일정은 날씨가 좋으면 후지노미야 역에 가서 시라이토, 타누키호, 후지산을 보는 것이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온통 구름 한가득이다. 후지산을 만나지 못해도 시라이토 폭포는 만나고 싶었지만, 몸은 그제 어제 체력 한계 테스트를 마친 뒤라 아직 조금은 지쳐있었다. 나는 어제 계획한 PLAN 2를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바로 시즈오카미술관에서 5월 26일까지 예정인 전시회였다. 장애인은 무료다. 매표소에서 지갑에 꾸깃꾸깃 네 번 접어놓은 영문 장애인증명서와 복지카드를 내밀었다. 오디오 가이드는 아쉽게도 일본어밖에 없었다. 구글 이미지 번역을 켜고 보고 있으니 직원이 다가왔다가 번역임을 확인하고 웃으시며 돌아가셨다. 촬영이 금지였기 때문이다.



에도시대의 민화들을 보고 있자니 우리네의 민화가 그려졌던 때와 별반 사람 사는데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마음에 들었던 민화의 엽서를 구매했다.
미술관이 오픈하기 전에는 가볍게 오차즈케를 먹었다. Dashichazuke En ASTY Shizuokaten (だし茶漬け えん ASTY静岡店)는 체인점으로, 나리타 공항 등 여기저기 있다. 시즈오카 지점은 굉장히 작았는데 다행히 손님이 한 명뿐이라 테이블석에 앉을 수 있었다. 테이블 석은 두세 개 밖에 없고 나머지는 다 바 테이블이라 사람이 많으면 휠체어로 들어가기 쉽지 않아 보였다.





아침 오차즈케는 고를 수 있는 메뉴가 정해져 있다. 구운 연어가 올라간 오차즈케에 명란젓을 추가했다. 다싯물을 배때지에 두둑하게 부어 속을 따뜻하게 덥힌 뒤 전시회를 보고, 이번엔 하루치 할당량 카페인을 충전하고자 카페를 두리번거렸다.
시내의 스타벅스는 테이블이 좀 붙어있어 답답하기도 하고 좀 다른 커피를(진한 커피, 일본식 카페오레 멈춰) 먹고 싶어서 신시즈오카역 부근 건물 지하 1층에 있는 espressamente illy Shin Shizuoka Cenova Shop(espressamente illy 新静岡セノバ店)로 갔다.
원래는 Tully's Coffee Shizuoka Pegasart로 가려고 했지만 늘 내사 그렇듯 길을 헤매다가 먼저 발견한 일리 카페로 충동적으로 들어섰다.


집이나 회사에서나 결국 최종적으로 찾는 것이 일리커피 캡슐이다. 무엇을 주문할까 고민하다가 정말 진한 커피가 먹고 싶어 에스프레소 마키아또(왼쪽) 모카치노(오른쪽)를 시켰다. 모두 솔로, 도피오 사이즈로 선택이 가능하다.
둘 다 솔로 사이즈로 주문했는데 귀여운 잔에 예쁜 라테아트로 서빙해 주었다. 맛있었다. 에스프레소 마키아또를 도피오 사이즈로 한잔 더 먹고 싶었지만 이따가 또 커피를 마셔야 하기 때문에 참았다.
일리(illy)는 커피 외에 식사 메뉴도 판다. 일본에서는 킷사텐이라고 하여 카페에서 식사도 함께하는 것이 일상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사람들의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토스트뿐만 아니라 토마토 스파게티, 커피가 아닌 티 등 다양한 메뉴가 있다.


시즈오카는 거리가 깨끗했지만, 꼬리뼈가 아팠다. 사진에선 직립보행이 가능한 인간은 잘 느끼지 못하겠지만, 경사로가 매끄러운 직선이 아닌 약간의 타원형이라 한번 멈춘 뒤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등의 브레이크 완급 조절이 필요했다. 어제 이 길로 캐리어 끌고 호텔까지 가다가 새끼손가락 부러질 뻔했다. 3cm도 되지 않는 높이인데 손가락을 걸어야 한다니 슬픈 일이다.



신시즈오카역에는 시즈오카에서 유일한 빔즈가 있어서 거기서 간단히 아이쇼핑 좀 하고, 동네를 한번 더 둘러봤다. 빔즈, 니코앤드 모두 좋아하는 브랜드인데 귀여운 제품이 많았다. 니코앤드에서 귀여운 빠칭코 키링을 습득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갓챠샵도 갔다. 갓챠=일본어의 의성어에서 유래된 말로, 확률성 아이템 뽑기를 의미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뽑기와 마찬가지다. 200엔을 넣고 공손한 너구리를 획득했다!


그리고 최근 유행하는 칼디의 멜론빵 스프레드와 카레 빵 스프레드를 각각 하나씩 구매했다. 오늘 우연히 여행 스케줄이 겹친 지인에게 선물하기 위해.
한참 쇼핑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는데 비가 무척 많이 내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우산을 폈지만 고정되지 않았다. 헉, 겨우 두 번째 사용하는 건데… 벌써 고장 난 것이다. 다행히 바로 앞에 세븐일레븐이 있어 투명 장우산을 집어 들었다. 참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것이 우산인데, 속이 쓰렸다. 카레 고로케, 치킨 가라아게, 감자 고로케도 하나씩 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등에 맨 배낭은 물론 양말까지 다 젖었다.


생각보다 시즈오카는 정말 작은 동네다. 왜 사람들이 근교 여행을 많이 다녀오는지 알 것 같았다. 내일은 노잼도시라는 나고야에 가는데, 어디가 더 노잼인지는 한번 직접 경험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노잼이 평화로워 너무 좋다. 실은 비가 오는 것도 좋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 젖어가는 바닥 그리고 그 특유의 냄새가 좋다.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겐 끔찍이 아플 하루도 나는 진한 커피와 소낙비에 기분이 좋아지는 하루를 살다니 역시 삶은 불공평하다. 개소리하지 말고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지금 있는 하루를 잘 쉬면 될 텐데 생각을 멈추는 것도 나에겐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모두에게 언제든 꺼내보고 싶은 여름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래본다.
Shizuo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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