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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해외탐방기

노란 산소호흡기처럼 앞길 누래지는 일본 여행 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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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2월 새로 생긴 항공사 에어프리미아에서 특가 항공권이 떴다. 특가 오픈일 저녁 남들이 떨어트린 도쿄 나리타 왕복 18만원 줍줍에 성공했다. 마침내 탑승일, 듣던 대로 이코노미 좌석도 보통의 저가항공의 레그룸과 다르게 아주 넉넉했고 단시간 비행임에도 모니터도 잘돼있었다. 그리고 위탁수화물도 15kg지만 이코노미의 경우 킬로당 만원으로 아주 인심 넉넉하다(미리 구매는 되지 않고 현장에서 추가 결제만 가능하며, 탑승 전 구매는  캐리어 추가만 가능한 표였다).


착륙 후 1시간 정도 지났을까, 기체가 한번 꿀렁이더니 헤드셋의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뚫고 다른 승객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지? 흔들림이 심하네 생각하는 순간 롤러코스터 정상에서 아래로 훅 꺼지는 느낌이 들더니 기체가 마구 흔들렸다. 그렇게 흔들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라고 생각한 순간 모든 승객들의 머리 위에서 노란색의 산소호흡기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도 이때는 사고가 정지됐다. 사람들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온갖 잡동사니가 떨어졌고 웅성이는 소리가 커졌다. 간식거리로 쿠키와 카피를 나눠준 지 오래되지 않아 더 그랬다. 승무원들은 자리에 앉아 마스크 써, 벨트 매 긴급상황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평화롭게 유튜브 by the way의 플리 “[playlist] 봄비를 기다렸던 고궁 박물관 직원, 가사 없는 음악”를 들으며 꾸벅꾸벅 졸던 나는 멍하니 산소호흡기를 쓰는 옆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헤드셋을 벗고 코앞에 떨어진 산소호흡기를 착용했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봤던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영화 인트로가 생각났다. 실제 1972년 안데스산맥의 비행기 추락 사고를 다룬 작품으로 골든글로브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추락하는 장면의 묘사가 너무나 생생하고 참혹해서 이따금씩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잡다한 생각이 스쳤다. 이럴 거면 아침에 왜 예금을 넣었지? 가방에 현금이 많은데. 마지막 메시지라도 써야 하나? 고프로 히어로 12 면세점에서 산 거 취소하길 잘했다. 승무원들은 계속해서 구호를 외쳤고 나는 착용한 산소호흡기에서 쉭쉭 들어오는 공기를 마셨다. 순간순간 뜨거운 압박감이 느껴졌다. 마침내 고도가 낮아지고 나서야 산소호흡기를 벗을 수 있었다.


고도가 안정권에 들어섰음에도 기체는 흔들렸다. 비행기 장치 이상으로 인천공항으로 돌아간다는 기장의 안내멘트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장의 목소리는 더듬거렸고 떨렸다. 회항한다는 말에 여기저기 몇몇의 탄식이 흘렀다. 나 역시도 아쉬웠지만 이대로 떨어지는 것보다야 좋은 결말이었다.


마침내 육지에 착륙하자 한숨소리가 들렸고 몇몇은 웃으며 울었다. 이제 안전했지만 모두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공포에 질려 보였다. 착륙하고서도 한참을 침묵 속에 각자의 휴대폰을 보며 앉아있었다.

보안상의 이유로 회항된 비행기에 대해 보안 등의 검사가 필요한지 국정원 직원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승무원들은 따뜻하게 데워진 기내식을 다시 꺼내 옮겨 담았다. 나는 마지막 순서로 비행기에서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다들 비행기 안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게이트 앞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황당한, 또는 화가 난 얼굴로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대처방안을 요구했다.

어떤 승객분은 빨리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지 않으면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울먹였다. 항공사 측에서 다음 비행 편을 17시 40분으로 안내했기 때문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나도 항공편을 다시 알아봤는데 3시 비행기도 몇 대 있었다.

우야곡절 오전 11시 20분에 도쿄로 도착했어야 하는 에어프리미아 기종 B787-9, 편명 YP731는 11시 20분 다시 인천으로 착륙했고 재탑승 시간은 5시간 뒤로 딜레이 됐다. 이로 인한 나비효과로 도쿄 나리타->인천 12시 비행기 또한 오후 5시 이후로 딜레이 됐다고 한다. 이에 대한 고지는 출발 20분 전 승객들에게 안내되어 나리타 제2터미널 출국장에 갇힌 사람들은 원성이 자자했다고.

착륙 후 데이터가 연결되고 나서야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기내 여압장치 이상으로 긴급회항했던 것이다. 여압장치란 공기를 압축해 조종실과 객실에 계속 압축 공기를 공급하고 배출하는 장치로, 압력을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항공기의 필수 장치라고 한다. 이 장치에 이상이 발생하는 경우 기내 산소공급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산소마스크가 한꺼번에 떨어진 것이다. 비행기가 바로 고도를 낮춘 이유도 압력 유지와 산소공급을 위해서였다. 기장 판단 아래 승객들과 승무원의 안전을 위해 무사히 인천으로 다시 착륙했다.

단순히 새로 생긴 이코노미석이 넓고, 그에 비해 저렴한 신생 항공사라고 생각했는데 이 경험을 겪고 나서 찾아보니 에어프리미아의 총 보유 항공기 수는 5대인데 1대가 이미 중정비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오늘 탑승한 항공기 또한 점검이 필요해졌으니 에어프리미아는 당분간 3대의 항공기를 운영할 수 있으며, 겨우 이 3대의 항공기로 새 취항지인 뉴욕, 샌프란시스코, LA를 포함 주요 도시들을 돌아야 한다는 점이다. 좌석이 앞쪽이라 들리는 이야기에는 이럴 줄 알았다는 멘트도 있어서 식겁했다. 부디 나머지 3대 운행에는 이상이 없기를 기도한다. 한 달 후에도 이 항공사 비행기를 타고 귀국하는데, 나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탑승시간과 새로 탑승할 게이트 번호와 함께 아무런 안내도 없이 받은 만 원짜리 음식 바우처 2장. 4층 푸드코트에 갔다가 여기선 못쓴다고 거절당했다. 내돈내산 짬뽕과 스텔라 맥주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8시 50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지하철 첫차를 탔고 혹여 늦을까 긴장됐는지 새벽 2시에 일어나 배고픔과 피곤함이 몰려왔다.


밥을 먹고도 한참 남은 지연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나는 우선 오늘 한잔도 먹지 못한 카페인을 채우기 위해 커피앳웍스로 향했다. 2만 원 바우처로 알차게 시켰다. 에티오피아 시디모 서커스 타테 G1 아이스 드립 한잔과 시즌 메뉴인 피스타치오 바닐라 플랫화이트, 두 잔만 시켰더니 점원이 😮이걸로 두장(2만 원) 다 쓰실 거예요??라고 하셔서 🫨앗 그럼, 당근 케이크도! 하나 주세요. 😮천 원 남는데 캔디도 할까요??라고 하셔서 🫨아네;;!! 그럼 호올스요. 이렇게 친절한 커피앳웍스 직원분 덕분에 2만 원을 알차게 썼다. 흰 티셔츠에 짬뽕국물까지 튀어서 쓰렸던 속이 누그러졌다. 커피앳웍스는 드립커피 맛집이다. 그만큼 늘 사람이 많고 지금도 줄 서있다. 드립커피는 향긋하고 당근 초콜릿은 달콤했다. 그제 테라로사에서 먹은 아이스 드립 못지않게.


지나간 고통은 빠르게 희석된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등이 따스워지자 새롭게 생성된 미션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차라리 1박을 도쿄에서 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첫 도시를 시즈오카로 정했기 때문에 가자마자 제일 빠른 교통으로 시즈오카를 가야 했다.

원래대로의 계획대로라면 나리타 익스프레스(넥스)로 시나가와역으로 도착한 다음, 시나가와역에서 시즈오카역까지 신칸센을 타는 것이다. 짐을 찾으면 넉넉히 12시쯤 될 것이라 생각하고 넥스, 신칸센 모두 표를 끊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도쿄 도착시간이 11시 20분에서 20시로 늘어났다. 나는 오늘 안에 시즈오카로 갈 수 있을까?

현재 시간 23시 51분. 나는 시즈오카로 가는데 실패했다. 캐리어를 찾고 대중교통을 탈 수 있는 지하 1층으로 갔을 때 시간은 저녁 9시 15분이었다. 서둘러 도쿄역에 숙소를 잡았다. 신칸센은 환불하고, 넥스는 날아갔다. 넥스는 시간에 늦어도 탈 수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1,500엔 가량 더 지불해야한다고 하여 다시 도쿄역 도착으로 발권했다.

그리고 넥스를 타기 직전 휠체어 바퀴 한쪽이 터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상시 갖고 다니는 공기주압기로 바람을 넣어도 다 샌다. 오쉣. 망했다…. 겨우겨우 도쿄역에서 숙소까지 오는데 성공했다. 수화물 파손 신고하러 간다… 내일 아침 출장수리를 부르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이거 꿈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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