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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책이 우리를 구원한다. 책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책으로 구원받는다. 드물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귀하게도. 고맙게도.
스물여덟 살, 회사를 그만두고 파리로 가겠다며 회사 책상 앞에 파리 지도를 붙었다. 그러면 갈 수 있을 알았다. 곧 갈 수 있다 믿었다. 하지한 ‘곧’이란 시간은 도무지 오지 않았고, ‘파리’도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하루하루 버티는 시간이었다. 당장 떠날 용기도 없으면서, 정말 거기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나는 막연한 꿈을 꾸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을 버티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무엇을 위해 버티는지도 잊어버렸다. 어느새 내가, 내 청춘이, 내 일상이 불쌍해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건 나였다. 내 일상을 망치고 있는 것은 내가 범인이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회사도 범인이 아니었고, 야근도 범인이 아니었다. 물론 파리도 범인이 아니었다. 내가 나를 불쌍하게 만들고 있었다. 마이클 커닝햄의 이 구절이 내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나를 구원할 의무는 나에게 있었다. 매일은 오롯이 내 책임이었다. 그 깨달음에 앞의 글을 써 내려갔다. 그리고 무뎌질 때마다 내가 쓴 이 기이한 반성문을 다시 꺼내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나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아직도 회사 책상 앞에는 파리 지도가 붙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위에 종이 한 장이 더 붙어 있다. 파리로 붕붕 떠다니는 내 마음을 알고, 어느 날 박웅현 팀장님이 나에게 써주신 글귀다. 이제는 반성문 대신 이 글귀를 읽는다. 서른여섯 살에도 마음은 시도 때도 없이 붕붕 떠다니니까.
봄이 어디 있는지 짚신이 닳도록 돌아다녔건만,
돌아와 보니 봄은
우리 집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었다.
- 중국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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