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with 나이트오프
오늘은 휠체어 배터리를 100%로 충전한 상태로 호텔에서 노샷푸 곶(ノシャップ岬)까지 도보로 가는 것이 목표. 거리는 4.3km. 구글맵 예상시간 버스 26분, 도보 58분. 비가 좀 적당히 오면 걸어서 충분히 가볼 만 한데 비가 얼마나 올지 잘 모르겠다. 아니면 오후 3시쯤에는 비가 그친다고 하니 차라리 그때쯤 가서 일몰을 보고 돌아오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부슬부슬 비가 미스트처럼 얼굴 위로 흩뿌려진다. 투명 편의점 우산을 펼치고 12시 35분, 노삿푸 곶을 향해 출발한다. 바로 노삿푸 곶을 가지 않고 가는 길에 있는 우니동 맛집(15시 클로징)에도 들릴 예정이다. 휠체어야 힘내!
처음엔 좋았다. 비가 별로 오지 않았고, 바다를 보며 가는 풍경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옆으로 차가 쌩쌩 지나가는 소리가 꽤 시끄러웠지만 귓가에 들어오는 노랫소리와 바다냄새가 운치있었다. 아래처럼 몸속이 다 부서져버린 나무기둥도 보았다. 인적 드문 그 길은 오롯이 나만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지구에서 완전히 혼자 남겨진 기분을 자주 느꼈다. 홋카이도 여행에서는.
노삿푸 곶으로 가는 길에는 쓰레기가 정말 많았다. 특히 캔음료가 많았는데, 가면서 보이는 것만 주워도 100L를 꽉 채울 만큼 많았다. 캔커피, 캔맥주가 대부분이었다.
바다 바로 옆으로 걸었으면 좋았겠지만 풀밭을 건너야해서 바다와 차도 중간 즈음으로 갔다. 늘 그렇듯이, 홋카이도니까 당연하게도, 길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구글맵은 직진하라고 했지만 도무지 직진할 수 없는 인도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럴 땐 왼쪽 동네로 들어갔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나왔다가...
그리고 구름이 갑자기 몰려왔다. 빗방울이 점점 거세지더니 나중엔 눈앞에 흐릴 정도로 비가 쏟아졌다. 게다가 정말 거짓말처럼, 듣고 있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서 처음 듣는 가수의 처음 듣는 노래가 흐르는데, 가사가 나를 직격타로 후두려팼다.
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실패다
구름은 지겨웁다 실패다 별로다
뭔가 생각이 나다 말았다
좋은 사람이 돼 볼까
농담을 배울까
아니면 아는 사람을 만날 때까지
돌아다녀 볼까
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실패다
구름은 지겨웁다 실패다 별로다
뭔가 생각이 나다 말았다
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실패다
고양이 어디 간다 달린다 바쁘다
새들이 뚜벅뚜벅 걷는다
새로 결심을 해볼까
밥을 또 먹을까
아니면 동네의 모든 골목길을
돌아다녀 볼까
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실패다
고양이 어디 간다 달린다 바쁘다
새들이 뚜벅뚜벅 걷는다
무슨 생각을 해봐도
준비가 안 된 것만 같아
커피를 마시고 나면 뭔가
좋은 생각이 날까
그러면 조금 달라진 기분일까
오늘의 날씨는 실패다 실패다
구름은 지겨웁다 실패다 별로다
뭔가 생각이 나다 말았다
….비 오는 날 휠체어 타고 걸어가지 말자. 바람이 많이 오는 날이라면 더 가지 말자…☔️⛈️⛈️⛈️⛈️ 위아래로 그냥 다 젖었고 중간에 멈춰서 우비를 꺼내서 입었다. 우비를 앞은 가려 주지 못했고 그냥 등짝 정도만 가려줬다. 화장하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에 온몸이 다 얼굴 젖어버렸기 때문이다. 중간에 멈출 수도 없었다. 지붕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러다 겨우 만난 작은 지붕 밑에 우산을 쥐느라 팔목이 시큰거려 들고 있던 우산을 땅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쳐다보는 누군가. 바로 야생사슴들이었다.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저 바퀴 달린 인간은 무엇인가... 하고 멀리서 주시하는 야생사슴.
진짜 코앞에서 야생사슴을 수도 없이 봤다. 왓카나이는 사슴과 함께 사는 동네였다.
돌아갈 때는 버스를 탔다. 슬로프를 처음 꺼내는 거라 버스 기사님은 어떻게 슬로프를 꺼내는지도 몰랐다. 주변에 있던 다른 버스 기사님이 도와줘서 겨우 슬로프를 뺄 수 있었다. 바닷바람과 모래에 녹슬어 철가루가 후드득 떨어졌다.
지친 몸이 버스에 타자 피곤이 몰려왔다. 올 때는 만리처럼 느껴졌는데 돌아갈 때는 정말로 눈 깜박할 사이에 도착했다. 의도치 않게 여러 번 욕을 되뇌는 하루였다. 고생을 사서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20분 만에 왓카나이 역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기사님은 슬로프를 빼시면서 맨손으로 하시다가 손을 베이셨는지 살짝 피가 났다.
너무 죄송해서 휴지라도 드리려고 했는데 괜찮으시다고… 그리고 번호판대로 220엔을 드리려고 했더니 110엔만 받으셨다. 한국의 장애인 수첩인데요라고 하자, 다음에도 수첩을 보여주면서 110엔을 내면 된다고 했다. 일본에서 여행하면서 수도 없이 여러 번 버스를 탔다. 하지만 이렇게 할인 가격을 인지한 채로 금액을 받는 분은 처음이었다.